문화 [2021.10] 1등은 결코 4등을 이길 수 없다
글 김민아(4등 각본)
죽은 식빵도 살린다는 오븐이 있다던데... 한때 위원회에 반짝이는 영예를 안겨주었으나 이제는 스트리밍 서비스 초성검색을 통해서야 찾을 수 있었던 4등이 부활했다. 유난히 4등이 많았던 도쿄 올림픽 덕분이란다. 잊고 있었다. 참으로 4등은 의미 있었다. 4등을 기획하고 시나리오 작업으로 참여했던 김민아 작가가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을...지도 모르는’ 4등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천재를 대하는 법
큰 대회가 코앞이니 밤이 깊도록 연습에 매진해야 하지만 광수가 누군가. 천재 수영 선수 아닌가. 광수는 해만 지면 선수촌 담을 넘어 포장마차로 달려가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운 뒤 주량도 모른 채 마신다. 그런데도 다음날 기록을 재면 전날 자신의 기록을 갱신한 상태다. 대적할 누구도 없으니 광수는 선수촌의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기만 하다.
1등은 독주(獨走)한다. 남을 앞질러 혼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해야만 1등을 하는 것이다. 내내 1등만 해서 1등이 재능이 돼 버린 사람은 자신의 재능 때문에 소외된 사람인지도 모른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제 손으로 만든 값비싼 상품을 노동자 자신은 절대로 살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상품으로부터 소외된다고 했는데, 조금 변주하자면 1등 천재는 의심의 여지없는 재능 때문에 운동을 뺀 나머지로부터 소외된다. 나는 이 사실을 4등 각본 작업을 위해 선수들과 선수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알았다. 코치와 감독, 선수, 학부모로 이루어진 소위 운동 관계자들은 세상에는 노력해도 안 되는 일도 있다고 했다. 운동 천재는 타고난다는 말이었는데, 내게는 그 말이 선수가 자신이 가진 게 무엇인지 모를 때 가장 위험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관계자들의 논평도 절반만 진실 같았다. 그들은 천재가 자신의 재능을 귀하게 여기고 오래 정진할 수 있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늘 눈앞의 성과가 중요하니 천재의 재능을 속히 빼먹는 편에 가깝고, 천재가 망가지거나 평범해질 땐 가차 없이 버리는 것 같았다. 영화 4등 초반 흑백 분량은 자신의 재능만 믿고 안하무인하더니 맞아야 싸다는, 쫓겨나도 할 말 없다는 구타유발자를 그리기 위함이 아니다. 이 시퀀스 안에는 천재로 대접받다 한순간에 버려진 안타까운 한 인간이 담겨 있다.
88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선수들은 지옥 훈련에 돌입한 지 오래지만, 이런 엄중한 상황에도 광수는 눈앞에 펼쳐진 노름판에 푹 빠져 선수촌에 복귀할 줄 모른다. 이제껏 독주만 독식해왔던 광수는 운동은 동료 선수들과 함께 하는 일이라는 걸 몰랐다. 국위를 선양해줄 천재 선수 한두 명만 중요할 뿐 나머지 선수는 없어도 그만이라는 관계자들의 엘리트 만능주의가 광수라는 기이한 인물을 키운 셈이다. 광수도 이런 국가 스포츠 시스템의 희생자라는 점에서 나는 아직까지는 광수를 옹호할 맘이 있다.
고통 받았으나 뉘우치지 못한다는 것
광수는 체벌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수 생활을 접은 듯 보였지만 ‘연맹’이라는 조직이 그리 허술할 리 없다. 광수는 불성실하고 제멋대로인 선수 생활 탓에 업계에서 퇴출당한 ‘꼴통’일 뿐이다. 광수의 시간은 그로부터 16년이 흘렀다. 짧지 않은 시간이니 변화가 일어나기에 충분했지만 광수는 이렇다 할 전망 없이 삶을 낭비한다. 정애가 광수에게 준호를 가르쳐 달라고 의뢰할 때 광수는 어쩌면 다른 사람으로 거듭날 기회를 만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광수는 선수촌을 뛰쳐나온 이유, ‘백 대’ 체벌 사건을 까맣게 잊었다는 듯 준호를 때리기 시작한다. 광수는 준호에게 체벌을 어떤 대단한 가르침으로 이해시키려 드는데, 이런 식이다. “내가 잘 나갈 때도 감독선생님들이 오냐, 오냐 하지 않고 나를 때려서라도 더 잡아줬다면 내가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거야.” 광수의 이런 인식엔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걸 직감으로는 알겠는데, 이 ‘문제성’을 문장으로 옮기려면 어찌해야 할까? 나는 꽤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그러던 차에 놀랍게도 이런 문장을 만났다. “무지로 인한 모든 행위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자발적인 것이 되자면 고통과 뉘우침이 뒤따라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도덕적인 책임)) 무슨 말인가. 광수가 운동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래서 ‘내가 제일 잘 나가’는 잘난 왕처럼 굴었던 과거는 무지에서 비롯된 행위일 수 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무지의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자발적인 일은 아니며 아직 구원받을 기회도 있다. 그러나 지도자의 폭력으로 그 자신이 가장 고통받았으면서도 자신이 더 맞지 않아 이렇게 초라해지고 말았다는 괴상한 논리로 16년간 살아왔다면, 광수는 과거로부터 무엇인가 배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때부터 광수는 뉘우침이 없으므로 ‘알고도’ 자발적으로 행하는 인간이 된다. 용서받지 못한 자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광수를 옹호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도덕적인 책임이라는 게 있다. 이때 도덕적 책임은 더는 자신만의 규범에 매이지 않고 나와 너 그리고 우리로 확장되는 윤리 감각이 되는데, 광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인물이 되고 만다.
메달 천국, 불신 지옥이 낳은 것
그렇다고 이 모든 책임을 광수에게만 지워야 할까. 광수를 가해자의 위치에 세우려면 동조자와 방관자도 함께 찾아내야 한다. 대회만 나가면 4등을 하는 준호이니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의심할 여지없이 준호겠으나, 준호를 조력하는 인물들 없이 준호가 있을 리 없다. 준호는 ‘어떤 결정을 할 때는 아동청소년 최선의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의 대상인 ‘아동 청소년’이지만, 스스로의 문제를 의제화하기 힘든 아동청소년의 조건상 관계의 자장 안에서 부대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다. 그런 준호를 어른들이 어떻게 이용(?)하는지 보자. 준호가 얻어맞아 가며 운동하고 있음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인물은 준호 동생 기호다. 기호는 폭력에 대한 어른들의 통상의 생각에서 비껴나 있다. 이를 테면 훈육을 위해서는 체벌은 ‘필요악이다’, ‘그렇지 않다’라는 관점이 아니라 기호는 자신의 형이 맞아가며 운동했기 때문에 이전보다 성적이 올랐는지 체벌 이전과 이후의 변화가 정말로 궁금하다. 그래서 준호가 드디어 ‘거의 1등’인 2등을 하던 날, 기호는 그토록 들떠서 물어보는 것이다. “형, 형은 정말 맞아서 2등 한 거야? 그 전에는 맞지 않아서 맨날 4등 했던 거야?”라고. (만일 체벌 이후 향상된 준호의 등수만을 칭찬받는 환경에서 기호가 자라난다면 기호는 체벌 옹호자가 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기호의 제보로 엄마는 준호가 맞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심지어 새벽에 준호 몰래 방에 들어와 준호 몸에 난 짙은 멍을 확인했음에도 정애는 이를 못 본 체한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수렁에서 건져 낼 힘이 있는 첫 번째 어른이었지만, 아이가 빠진 수렁에 아이를 그저 둔다. 곧 이어 준호 아빠도 아이가 체벌당해 왔단 사실을 알게 되지만 “감독이 선수를 때려?” 라고 분노하는 게 전부다. 준호 아빠는 한 술 더 떠 한 번만 더 체벌하면 ‘물밥’ 못 먹게 할 거라고 광수를 협박조로 달래더니 돈이 든 봉투를 건넨다. 그는 말하자면, 여전히 수렁에 빠져 있는 아이의 얼굴을 안타까이 바라보더니 맨홀 뚜껑을 아예 닫아버린 사람이다. 이보다 무서운 어른들이 있을까.
준호의 수경이 의미하는 것
감독과 나 역시 수시로 구멍에 빠졌다. 우리는 과연 준호를 건져낼 수 있을까. 그러다 우리는 준호가 처음 수영을 시작한 이유를 생각해냈다. 그때 준호는 학교만 파하면 수영복과 수경을 챙겨 수영장으로 달려가는 행복한 소년이었다. 이제 준호의 수경은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 걸까.
앞서 나는 준호를 연약하다고 표현했지만 어린이의 다른 말인 이 작은 사람은 어른의 통념에 쉽게 가둬지지 않았다. 영화 속 준호는 주변이 온통 캄캄해도 빛을 향해 나아가는 아름다운 인물이다. 준호는 이걸 쓰고 메달 많이 땄다며 광수가 건네 준 수경을 점퍼 주머니에 한동안 넣고 다닌다. 그러다 엄마의 강요도, 광수의 코칭도 더는 없이 혼자만의 (사색의)시간을 가진 뒤에 대회에 출전해보기로 마음먹는다. 대회 당일 새벽, 방을 나서는 준호는 책상에 놓인 광수의 수경을 잠시 바라본다. 그토록 하고 싶은 수영을 쭉 이어갈 수 있으려면 준호는 어떻게든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한다. 그런 절실함이 마음속에 차올랐으니 광수의 수경은 합격 엿이거나 행운의 부적이었다. 그러나 준호는 자신의 수경을 집어 든다. 언젠가 4등 시사회가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나는 말했다. 준호는 이 장면에서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구세대와 담백하게 이별하고 있다고.
영화 4등의 엔딩은...
인권 잡지 편집자는 내게 영화 4등 원고를 부탁하며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실패도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수많은 4등들을 응원해 달라”고 했다. 얼마 전 끝난 도쿄 올림픽에서 4등 선수들이 많이 나왔다. 4등임에도 충분히 만족하고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았고, 4등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기사도 더러 보았다. 긍정적인 변화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 환호를 의심한다. 진심으로 4등이 1등보다 낫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대신 나는 1등은 4등보다 초조하고 불안해 한다는 이야기를 믿는다. 고전작품들의 단골인 ‘원하는 것을 얻는 자는 반드시 파멸한다’는 메시지도 독주하는 자가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1등 주인은 매번 바뀌지만 1등 신화는 불변하므로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1등에 맞서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4등이 1등보다 사회적일 수는 있다. 4등은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동료가 함께 서 있다. 나는 지금 1등의 외로움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래서 영화 4등 엔딩에서 준호가 기어이 1등을 하고야 말았을 때 나는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