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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만난사람 [2016.12] 성큼성큼 낮은 자리로 (대한민국 인권상 박문수 신부)

글 정라희 사진 이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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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힘이 없었다. 빈자들의 눈물이 흩뿌려진 땅 위로,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속속 들어서고 화려한 마천루가 높이 올라갔다. 개발 논리는 빈민들을 갈 곳 잃은 점으로 흩어놓았다. 벽안의 신부는 믿을 이도 기댈 곳도 없는 빈민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2016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자인 박문수 신부는 일평생 가난한 자의 삶을 개선하는 데 노력해왔다. 사회학자로서 빈민과 관련한 연구를 수행하고 활동가들을 지원했으며, 실제 그들 삶의 터전으로 들어가 공동체 운동을 펼치며 연대를 강화했다. 이처럼 낮은 데로 임한 사제의 발걸음은 빈민과 동행하며 세상의 변화를 이끌었다.


┃  한국인과 함께 오래도록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 박문수 신부를 만나러 서강대학교 이사장실로 향했다. 생활한복 차림의 노신부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그에게 한국에서 보낸 47년의 삶을 갈무리할 의미 있는 소식이 전해졌다. '2016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보상을 바라고 달려온 인생은 아니다. 그러나 70대 중반에 이른 이때 들려온 수상 소식은 젊은 날을 쏟아부은 지난 시간을 담담히 회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상 소식을 접하고, 시상식에서 어떤 소감을 전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박문수 신부는 가장 먼저 "안중근 의사를 떠올렸다"고 전했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 수감 당시 동북아시아의 비전을 담은 동양평화론을 구상했다. 당시만 해도 '인권'은 보편적인 단어가 아니었으나, 안중근 의사는 이미 각 사람의 종교를 초월한 인권의 기본 정신을 제시하며 아시아의 연합을 꿈꾸었다.


   "당시는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되기 약 50년 전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인권상을 받는다는 것은 저에게도 매우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부족하나마 한국인 선배인 안중근 의사와 정신적으로 연결되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1969년에 처음 한국 땅을 밟은 이후, 47년간 한국인과 동행해왔다. 이제 한국은 그에게 또 하나의 조국이다.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나고 자란 그는 1985년 귀화해 진짜 한국인이 되었다.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한국인들과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마음으로 미국 시민권을 반납했다. 현재 사용하는 이름인 '박문수'는 본명 프란시스 부크마이어에서 비롯했다. 전 서강대 총장인 류장선 신부가 지어준 것. 책을 의미하는 독일어 'Buch'에서 현재의 성인 '박'과 함께 글월 '문(文)'자를, 책임지는 하인이라는 뜻의 'meier'에서 지킬 '수(守)'자를 가져왔다고 한다. 조선시대 암행어사 박문수를 연상하게 해 한국인에게는 더욱 친숙한 이름이다.


   민초의 고충과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암행어사처럼, 박문수 신부 역시 한국에서도 가장 어렵게 살아가는 빈민들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애초에 한국에 왔을 때는 생물학도로서 학문 활동을 이어가며 정의 구현을 실천하는 사제로서 살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1969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강행하던 시기였다.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고 폭력을 자행하며 언론을 통제하는 당시 한국의 현실을 지켜보며 그는 애초 계획했던 진로를 수정했다.


   게다가 당시는 대다수 한국인이 가난에 허덕이던 때였다. 먹고살기 위해 농촌을 벗어나 서울로 와도 살 곳이 없어 강변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당시 자신의 전공인 생물학이 한국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요원하겠구나 싶었다. 사제 서품을 받은 이듬해인 1974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 주립대 대학원에서 도시사회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979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한국 빈민 연구를 수행하며 사회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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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민의 친구, 거리의 사제


박문수 신부가 한국 빈민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한국 빈민운동의 대부'라 불리는 고(故) 제정구 의원과 정일우 신부의 영향이 컸다.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통하는 막사이사이상 수상자인 두 사람은 1970년대에 경기도 시흥시에 '복음자리마을'로 집단 이주하며 한국 빈민운동 기반을 다진 인물로 꼽힌다. 박문수 신부는 미국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면서도 꾸준히 두 사람과 연락을 이어가며 한국 빈민운동 관련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1985년에 제정구 의원과 정일우 신부 주도로 '천주교도시빈민사목협의회'가 설립되었다. 박문수 신부는 빈민 문제와 관련한 저서와 보고서를 작성하며 이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1987년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도시빈민사목위원회를 설치했다. 박 신부는 위원으로서 재개발 지역을 방문하며 철거민들의 아픔을 보듬고 투쟁을 도왔다. 그 과정에서 그는 현장과 괴리된 연구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시절, 학생들을 데리고 철거 현장에 나서 철거 시도를 막은 일화도 전해온다. 거주지에서 내쫓기는 주민의 아픔을 지켜본 학생들은 현장 상황을 보고서로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렇게 그는 학술 연구와 조직 이론의 실제를 현장 운동을 통해 확인했다. 1999년부터는 20년간의 교수 생활을 아예 접고 현장 활동에 더욱 집중했다.


   지금까지 박문수 신부는 철거 지역 빈민과 비닐하우스촌 주민, 임대주택 주민의 주거권 실현을 위해 현장 곳곳을 누볐다. 돈암동, 양평동, 신당동, 삼양동, 행당동, 이화동, 신내동, 봉천동, 무악동 등을 비롯해 부천 오쇠동과 안산 고잔동 등에 이르는 서울ㆍ경기의 재개발 지역 세입자의 강제철거에 맞서 주민의 주거권 보장에 앞장섰다. 개발이 확정되고 철거를 강행하는 무리들에 맞서면서 그는 빈민의 곁을 지켰다. '거리의 사제'라는 별명은 그렇게 그의 이름에 따라붙었다.


   이러한 활동은 개발 지역 내에 빈민들의 가(假)이주단지 조성 요구로 이어졌다. 덕분에 빈민들은 임대주택 입주 전까지 우선 거주할 수 있는 주거 시설 확보를 여러 지역에서 성취할 수 있었다. 박문수 신부도 무악동 주민과 함께 70여 가구가 살 수 있는 가이주단지 설치에 성공했다.


┃  공동체와 더불어


무악동에 가이주단지를 설치한 후, 그의 관심은 주민 공동체를 단단하게 만드는 데 쏠렸다. 주민 공동체는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는 연대이자, 일상생활? 생?지 주민 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해 주민 지도자를 비롯한 주민 대상 교육을 지역 활동가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임대주택 입주 후에도 마을 공동체를 꾸려갈 사전 준비 작업에 나섰다. 여러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악동 공동체의 협동조합으로 시작한 '한솥밥'이라는 출장 도시락 뷔페 사업이다. 조합 활동을 통해 취업이 어려운 주민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빈민 운동을 하면서 보람도, 고난도 함께 느꼈습니다. 그래도 한솥밥 협동조합 활동을 할 때는 뿌듯한 기억이 더 많습니다. 가톨릭교회 서울대교구 사무국의 지원이 있기는 했지만, 원칙은 항상 '주민 참여'에 있었습니다.“


   주문이 밀리거나 운전 담당 주민에게 사정이 생길 때면 그가 운전사를 자청하기도 했다.트럭이나 탑차를 손수 운전하며 주민과 함께 땀 흘려 노동한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듯했다. 아쉽게도 한솥밥 사업은 수익성 악화로 지속할 수 없었지만, 그에게는 보람을 느낀 순간으로 남아 있다.


   그 시절, 그는 스카우트 지역대 육성 단체장으로도 활약했다. 그는 스카우트의 존재가 지역 공동체에 여러모로 보탬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참여하는 주민에게는 보람을 느끼게 하고,아이들에게는 일찍부터 기질과 진로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 실생활에서도 계획성과 실행력이 길러져 공동체 문화 개선에도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주민 중에는 장성해 스카우트 대장이 된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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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 운동을 넘어 문화로


그사이 한국은 빠르게 성장했다. 빈민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도 과거와는 달라졌다. 이제 한국은 절대 빈곤이 아닌 상대 빈곤으로 인한 고통이 더욱 큰 나라다. 산업화를 거치며 절대 빈곤은 해결되었지만, 빈부 격차는 더욱 심화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빈부격차로 교육과 문화 측면에서 소외되는 사람은 더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의 빈민 운동의 핵심이 교육과 문화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진단한다


   변화의 기반은 역시 '공동체'다. 그는 한국에서는 지역 주민과 경찰 사이에 공동체로서의 연대가 없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이 때문에 철거를 비롯한 여러 사회문제가 발생했을 때 비인간적인 처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박원순 서울시장 취임 후 재개발 시행령 변경을 통해 재개발 과정에 세입자들이 참여하고, 철거 지역 주민이 장기간 안전하게 생활할 가능성이 열렸다. 그와 같은 활동가들이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바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변화다.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운동 역시 군사력보다 공동체 중심으로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래로부터 공동체를 건전하게 구축하며 진행하는 개발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안적 공동체 운동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지만, 성공하기가 쉽지 않아요."


  박문수 신부는 인권을 이제 한국 문화의 일부로 여겨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단순하게 '우리나라는 유엔 인권선언문에 동의한 국가'라는 인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인권에 대한 관심이 당연한 나라.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와 같은 이들이 앞서 걸어간 길이 있어 조금 더 과감하게 한걸음을 내디뎌본다.



정라희 님은 전문 인터뷰어로 사람과 산업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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