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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톺아보기 [2022.03] 우리는 아직 늦지 않았다

글 김영미(분쟁전문 PD)

 

김영미 분쟁전문 PD는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을 취재하며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 뛰고 있습니다. 현재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고통받는 피란민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세계는 왜 싸우는가』, 『전쟁터에서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이리핀. 러시아 폭격을 피해 집을 버리고 대피 중인 우크라이나 이리핀 주민들 _ 2022. 3. 9.
우크라이나 이리핀. 러시아 폭격을 피해 집을 버리고 대피 중인 우크라이나 이리핀 주민들 _ 2022. 3. 9.

 

민간인을 향한 총구

 

유리 네치포렌코라는 14살 소년은 우크라이나 부차에 살고 있다. 한 달 전 소년은 일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을 당했다. 3월 17일 오전 11시.

 

“나는 그 장소와 시간, 날짜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소년은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날 유리는 아버지 루슬란(49)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약과 식량을 구하러 구호품을 나눠주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부차는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 인근 도시로, 당시 키이우로 진격하려는 러시아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사람들은 지하 방공호에 숨죽이며 숨어 있었고 이내 전기, 가스, 식수가 끊겨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웃들이 고통받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던 유리의 아버지가 그들을 위해 생필품을 구하러 나섰다. 부자는 출발 전, 민간인임을 알 수 있게 하얀 베갯잇을 찢어 만든 백기를 자전거에 꽂았다.

 

그렇게 위험한 길을 나선 유리와 아버지는 도중에 갑자기 러시아 군인을 만났다. 그들은 곧장 두 손을 들었다.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음을 알리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순간, 아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아버지에게 러시아 군인이 총을 쏘았다. 아버지는 가슴 쪽에 총알 2발을 맞고 힘없이 쓰러졌다. 러시아 군인은 유리에게도 총을 쏘았고, 소년은 왼손을 맞고 땅에 쓰러졌다. 이윽고 군인은 소년의 머리도 쏘았지만, 운 좋게 머리를 감싸고 있던 후드티만 뚫고 나갔다. 유리는 죽은 척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리고 군인이 그들을 지나쳐 탱크를 타고 가는 사이에 무작정 뛰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남겨둔 채.

 

아버지를 두고 온 죄책감에 울던 유리를 보다 못해 유리의 어머니는 흰색 스카프를 둘러썼다. 민간인임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사건 장소로 향한 유리의 어머니는 러시아 군인들에게 애걸한 끝에 간신히 남편의 시신을 둘러메고 왔다. 유리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집 정원에 묻었다. 유리는 우리 취재진 앞에서 무표정하게 이 모든 장면 하나하나를 설명했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어린 그가 감당하기엔 너무 끔찍한 기억이다.

 

 

403명의 목숨

 

유리는 부차에서 벌어진 집단학살의 핵심 증인이다. 부차에서는 러시아군에 처형당한 후 집단매장된 민간인 시신 403구가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고,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는 이를 ‘집단학살(Genocide)’로 규정했다. 특히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럽의 나라들은 21세기에 유럽이라는 문명 세계에서 이 같은 집단학살이 일어난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반면 러시아는 이 죽음을 두고 우크라이나 현지의 군 당국이 벌인 자작극이라고 발표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서로 상대국이 한 일이라며 공방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차에는 많은 민간인 목격자들이 있다. 유리도 그중 한 명이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민간인임을 알리기 위해 백기를 꽂거나 흰 스카프를 둘러썼었다. 그들을 쏜 상대는 분명 러시아군이었다는 증언과 증거가 속출하고 있다.

 

누가 이 일을 벌였는지에 관한 진실을 밝히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망한 민간인들의 존재다. 그 구덩이에서 발견된 403명 모두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누군가의 아들이었으며, 어머니이자 누이들이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가족이고 친구였다. 각자 꿈이 있고, 미래가 있었던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이웃이었다. 그 귀한 생명이 손이 뒤로 묶인 채, 혹은 비닐에 쓰레기처럼 담겨서 구덩이에 묻혔다. 이들 중 누가, 자신이 이렇게 음식물 쓰레기처럼 버려질 것이라고 상상이나 해봤을까. 더 끔찍한 사실은, 지금은 부차 한 군데 정도만 밝혀졌지만 앞으로 러시아가 점령한 다른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집단학살의 현장이 더 많이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켜지지 못한 약속

 

인류는 지난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수많은 인명을 잃었다. 그 희생 위에서 뼈아픈 반성과 함께 유엔을 설립했고, 제네바협약을 만들었다. 제네바협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9년 8월 12일에 체결된 것으로, 협약의 목표는 전쟁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전장에 있는 병력 중의 부상자와 병자의 상태 개선을 위한 협약(적십자협약이라고도 부른다), 해상에 있는 병력 중의 부상자와 병자 및 조난자의 상태 개선을 위한 협약, 포로의 대우에 관한 협약, 전시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협약 등을 포함한 4개 협약이다. 이상 4개 협약으로 이루어진 제네바협약은 모든 유엔 회원국이 가입했으며, 주권을 가진 나라들은 이 협약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우리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배운다. 제네바협약에 따르면 무장한 군인이 민간인을 조준해서 쏘아 죽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세대에 제네바협약은 일련의 여러 사건으로 깨졌다. 특히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 중 벌어진 민간인 학살 및 집단매장은 명백하게 제네바협약을 어긴 것이다. 전쟁과 민간인 사망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민간인을 겨냥한 폭격이나 학살은 금지되어 있으며, 이는 너무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원칙이다.

 

그런데 왜 이번 부차 사건 같은 비극이 벌어지고,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내전에서 민간인들은 보호받지 못할까? 민간인들은 비무장 상태로 무장 상태인 군대와 대적할 수가 없다. 생각해 보라. 전쟁 중에 총을 든 사람과 총을 들지 않은 사람이 맞붙어 싸우면 누가 죽겠는가. 그래서 군인이 민간인을 총으로 죽이는 것은 매우 비겁한 일이다. 때론 경제적 이해관계로, 혹은 패권 싸움으로 전쟁이 일어날 순 있다. 그러나 어떤 전쟁에서든 이 원칙만큼은 최우선으로 지켜야 한다. 제네바협약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생명을 잃은 대가로 만들어진 값비싼 협약이다. 제네바협약은 다음 세대에 물려줄 인류의 유산이기도 하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들이 ‘왜 어른들이 제네바협약을 깼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우리는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도 나쁘지만, 그 전쟁을 방관하는 것도 옳지 않다. 우리는 이번 집단학살이 우리 세대에 벌어진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전쟁 속 민간인 지켜내야 할 것

 

전쟁의 피해는 목숨을 잃은 사람들만 입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날까지도 평범한 일상을 보냈을 우크라이나 시민 모두가 이 전쟁의 피해자다. 키이우에서 주부이자 직장인이었던 율리아(38)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 부부는 10년 동안 돈을 모아 누구나 꿈에 그리는 아파트를 장만한 지 불과 두 달밖에 안 되었다. 우리의 전 재산과 시댁 돈까지 끌어들였다. 그 아파트를 사기 위해 우리는 한 번도 돈을 맘껏 써본 적이 없다. 그런 우리 아파트가 폭격을 맞았다. 이 억울함을 어디 가서 말해야 하나.”

 

자동차 할부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전쟁통에 불에 타서 차를 버리고 피란했다는 사람,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해서 너무나 신이 났던 청년, 더는 학교를 갈 수 없게 된 아이들, 아빠가 우크라이나군에 징집되어 엄마와 아이들만 추운 날씨에 걸어서 국경을 넘는 가족들…. 이렇게 수많은 가족이 이산가족이 되고, 그 와중에 노인들은 피란조차 가지 못한다. 다리나 허리가 아파서 멀고 험한 피란길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취재원의 전화 통화에서 들리는 그의 할머니의 “어서 안전한 곳으로 가라. 우리는 여기서 너희를 기다리마”라는 말이, 마지막 인사처럼 슬프게 들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피란을 떠날 엄두도 못 낸다. 이 모두가 전쟁이 낳은 피해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듣는 전쟁은 너무 뻔하고 관념적이다. 하지만 그 뻔한 뉴스 속에 저렇게 애절한 민간인들의 사연이 있다.

 

국제사회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이번에 알려진 부차의 민간인 학살사건을 제대로 규명하고, 국제 사법체계를 통해 단죄하는 일이 그것이다. 우리에겐 이를 위한 시스템이 있다. 국제형사재판소(ICC)도 있고, 제네바협약도 있다. 이 시스템을 가동하여 전쟁에서 민간인의 인권을 최소한이라도 지켜줄 수 있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 우리는 이 시스템을 윗세대에게 물려받았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우리가 받은 그 유산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시간이다.

 

폴란드 포즈난. 폴란드의 시민 사회에 의해 조직된 우크라이나 피란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원조. _ 2022. 3. 12.
폴란드 포즈난. 폴란드의 시민 사회에 의해 조직된 우크라이나 피란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원조. _ 2022. 3. 12.

 

제네바법(Law of Geneva)

출처 : 대한적십자 국제인도법의 분류 중

/ 기원
1859년 6월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Sardinia) 왕국은 프랑스와 연합하여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하여 롬바르디아(Lombardia)라는 큰 평원에 있는 솔페리노 언덕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하게 되었다. 이 솔페리노전투는 교전 양측 35만여 명의 군인 중 4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격렬하고 참혹한 전투였다. 이때 스위스 청년실업가 앙리 뒤낭은 사업차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를 만나러 롬바르디아 평원을 지나던 중 이 전투의 비참성을 우연히 목격하고 자기의 사업은 잊은 채 마을 부녀자들과 함께 ‘Tutti-Fratelli(모든 사람은 형제다)’라는 인간애, 형제애를 바탕으로 쌍방 부상자를 헌신적으로 구호하였다. 그 후 앙리 뒤낭은 3년간의 집필 끝에 책 《솔페리노의 회상》을 저술하여 2가지 혁신적 제안을 하였다. 그 제안 중의 하나는 전쟁 중에 부상당하여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부상자들은 그대로 버려둔다는 것은 죄악이기 때문에 적군과 아군의 차별 없이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구호단체를 설립하여 평상시에 자원봉사자를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 구호단체의 전시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국제협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862년에 출간된 이 책은 유럽 각국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제네바에서는 앙리 뒤낭을 비롯한 5인 위원회가 구성되어 이 제안을 구체화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오늘날 적십자사 또는 적신월사가 결성되어 인도주의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5인 위원회에서 작성된 협약 초안은 1864년 8월 22일 12개국이 참가한 외교회의에서 육전에 있어서의 부상자 보호를 위한 최초의 제네바협약으로 탄생하게 된다. 이 협약의 정식명칭은 ‘전지(戰地)에 있어서 군대 부상자의 상태개선에 관한 1864년 8월 22일 자 제네바협약’ 이며, 10개 조문으로 되어있다. 이 협약의 목적은 전쟁터에서 부상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군인은 국적을 불문하고 보호하고 치료하여 주며 그들을 구호하는 요원이나 시설도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있다.

/ 발전
최초의 제네바협약은 육전에서의 전쟁 희생자만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점차 전쟁의 양상이 변화함에 따라 이것을 해전에 적용하기 위하여 ‘1864년 8월 22일 자 제네바협약의 제원칙을 해전에서 응용하기 위한 1899년 7월 29일 자 헤이그협약'이 제정되었다. 또한 병상자, 조난자 못지않게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여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하는 전투원 즉 포로에 관해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29년 7월 27일 자 제네바협약’이 제정되었다. 그 후 이 3개 협약의 제네바협약이 제2차 세계대전까지 적용되어오는 과정에서 발견된 결함이나 미비한 상황을 보완하는 작업이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 의해 착수되어 3년여 동안의 노력 끝에 1948년 제17차 국제적십자회의를 거쳐 1949년 8월 12일 제네바에서 개최된 외교회의에서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협약이 추가로 채택됨으로써 ‘전쟁 희생자 보호에 관한 4개 제네바협약’이 완성되었다.

/ 현행 제네바 4개 협약
제Ⅰ제네바협약 - 육전에 있어서의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개선에 관한 제네바협약
제Ⅱ제네바협약 - 해상에 있어서의 군대의 부상자, 병자 및 조난자의 개선에 관한 제네바협약
제Ⅲ제네바협약 -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
제Ⅳ제네바협약 - 전시에 있어서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네바협약

/ 추가의정서 Ⅰ, II
1949년 제네바 4개 협약이 제정된 후에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베트남전쟁, 인도, 파키스탄전쟁, 기타 아프리카 무력충돌 등에서 야기된 게릴라 전투원의 처우문제, 민간 항공기와 그 승무원의 문제 등 기존의 제네바협약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여러 인도적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1968년 세계인권선언 20주년에 유엔총회가 채택한 ‘무력 충돌 시의 인권존중’ 결의사항에 따라 ICRC가 중심이 되어 현행 제네바협약을 보완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의 결실로 1972년부터 2차례의 정부 전문가회의와 4차례의 외교회의(1974~1977년)를 거쳐 제네바협약에 대한 2개의 추가의 정서가 1977년 6월 8일에 채택되었다.

1977년 제Ⅰ추가의정서 - 1949년 8월 12일 자 제네바제협약에 대한 추가 및 국제적 무력충돌의 희생자 보호에 관한 의정서
1977년 제Ⅱ추가의정서 - 1949년 8월 12일 자 제네바제협약에 대한 추가 및 비국제적 무력충돌의 희생자 보호에 관한 의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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