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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2021.05] 소수민족 인권과 미얀마 민주주의

글 김원장(KBS 방콕특파원)

필자에게 보내 온 미얀마인들의 사진
필자에게 보내 온 미얀마인들의 사진

 

지난 7일 미얀마 양곤, 한 청년이 무릎에 총상을 입고 쓰러 졌다. 주위를 둘러싼 군인들이 청년을 조롱한다. 청년의 헬맷을 벗기고 청년의 손에 쥐고 있던 가방에서 옷가지 등을 빼내갔다. 청년은 그때까지 살아있었다.

 

부상을 입거나 죽은 시민을 대하는 군인들의 모습에서 권력과 전쟁의 광기를 본다. 미얀마 국민의 70%를 차지하는 버마족은 대부분 불교를 믿는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교리는 모든 존재에 대한 존귀함을 근본으로 한다. 하지만 군인들은 자신들이 죽인 시민들 앞에서 조차 무례하다. 부상자를 조롱하고 시신을 하수구에 내던진다. 인간의 존엄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미얀마는 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그리고 62년 네윈 (네윈은 아웅산장군과 함께 일본으로 넘어가 미얀마 독립군 을 창설한 30명 중 1명이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북쪽으로는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만년설이 덮여있고, 서남쪽으로는 인도양을 접한 자원 대국이지만 네윈의 ‘버마식 사회주의’에 의해 세계 최빈국으로 추락했다.

 

60여 년의 군부 통치를 통해 미얀마의 군부는 확고한 지배 세력이 된다. 독립을 위해 자치 군대의 필요성을 경험한 국민들은 독립 이후에도 소수민족의 독립을 막기 위해 강한 군대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군인들이 주주인 독점 국영기업과 은행이 생겨났고 이들 기업은 초기 산업형성기부터 막대한 자본을 형성했다. 군이 경제를 지배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군에 의한, 군을 위한, 군인들의 나라가 됐다(동남아 에 태국이나 캄보디아처럼 군부 정권의 독점이 쉬운 이유도 여기 있다).

 

군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자연스럽게 인권은 후순위가 된다. ‘연방의 결속’, ‘국가의 유지’가 통치이념인 나라에서 ‘인권’은 이를 위해 희생될 수 있는 후순위 가치다. 이 순위를 바로잡기 위한 인류 천 년의 역사는 무시됐다. 이 순서를 바로잡기 위한 시민들의 움직임은 지난 88년부터 시작됐다.

 

88년 8월 양곤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시위대가 거세지자, 국영TV에 네윈이 등장했다. “경고합니다. 우리 군이 소집되면 발포할 것입니다. 우리 군은 결코 총을 허공에 쏘는 일이 없습니다” 실제 군은 시민들에게 발포했고 3천여 명의 시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공교롭게 아버지의 암살 이후 영국에 살던 ‘아웅산 수치’가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귀국 한 해도 88년이다. 가두시위에 동참한 아웅산 수치는 수십만 명의 군중들 앞에서 그 유명한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외친다. 이후 그녀는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이 됐다.

 

이른바 ‘8888’ 항쟁으로 네윈 독재는 무너뜨렸지만, 사회 안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군부가 집권한다. 이때부터 아웅산 수치의 구금 생활이 시작된다. 하지만 군부는 선거제도를 도입하고 상당수 내각을 민간에 허용한다. 90년 치러 진 총선에서 마침내 아웅산 수치의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승리한다. 하지만 군부는 총선을 부인하고 재집권한다. 2007년에는 군이 독점한 에너지 회사들이 가스요금과 휘발유 가격 등을 2배 이상 올렸다. 이에 항의한 시민들과 스님 들이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고 또 수백여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이를 샤프란혁명이라고 부른다. 샤프란 꽃의 붉은 빛을 띤 스님들의 승복에서 유래했다). 미얀마 민주화가 필연적으로 유혈투쟁이 되는 이유도 군이 사회 권력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미얀마에서 시민 권력의 쟁취는 정부가 아닌 군대와의 싸움이다.

 

서방세계의 경제제재를 못이긴 군부가 마침내 아웅산 수치를 풀어주고 민주적인 총선이 실시된다. 민주진영은 결국 2015년 집권에 성공한다. 첫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군부를 위한 헌법은 여전히 유효했고, 대통령이 아닌 군부가 여전히 군을 통치했다. 의석의 25%는 투표도 하기 전에 자 동으로 군에 배정됐다. 이 기울어진 권력구조에서 집권한 아웅 산 수치는 군과의 권력분점을 선택했다. 겉으로 균형을 찾은 것 같은 이 권력구조는 소수민족과의 분쟁이 불거지면서 모순 구조를 드러낸다.

 

북서부 라카인주에 살던 로힝야족 극렬단체가 잇달아 살인 과 방화를 저지르자, 2017년 미얀마 군부는 로힝야족을 집단학살한다. 2만 명이 넘는 로힝야족이 죽고, 수천 명의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희대의 인권유린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아웅산 수치는 이듬해 유엔진상규명위원회에 출석해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주장한다.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이 소수민족 인권을 외면하는 끔찍한 장면이 연출됐다. 유럽에서는 아웅산 수치의 노벨평화상을 취소하라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로힝야족 학살사건에서 보듯이 미얀마의 민주화는 소수민족을 외면하면서 이뤄졌다. 민주화된 문민정부가 들어섰지 만, 이슬람을 믿는 로힝야족은 주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소수민족에게 자치권을 주겠다는 약속은 번번이 백지화됐다. 지난해 총선에서도 100만 명의 소수민족 국민들이 투표권을 박탈당했다. 미얀마에서 인권의 성장은 주류인 버마족의 인권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쿠데타가 일어났고 군인들의 총탄에 쫓긴 주류 시민들이 이제는 소수민족 반군과 연대한다.

 

소수민족 인권과 미얀마 민주주의

 

2021년 2월 쿠데타 이후 800명 가까운 시민들이 군경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시민들은 지난 총선에서 당선된 몇몇 의원들과 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를 구성했다. 임시정부격인 연방의회 대표위원회는 카렌반군(KNU)이나 카친반군 등(KIA) 소수민족 반군들과 연대해 국민방위군을 창설했다. 이들 소수민족들과 합의한 헌법초안을 공개하고 국민통합 정부(NUG)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이 통합정부에도 로힝야족 등 일부 소수민족은 제외됐다(미 의회는 미얀마 민주진영에 계속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미얀마 내 상당수 소수민족에게 미얀마의 쿠데타는 버마족 시민 대 버마족 군대와의 싸움이다. 한때 소수민족을 차별하고 학대한 미얀마 집권층이 군부 쿠데타로 다시 궁지에 몰리자 소수민족에게 연대를 주문한다. 가해자가 더 큰 가해자에게 희생되자 피해자와 연대한다. 미얀마의 국민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연대는 이 모순을 딛고 미얀마 군부와 싸워야한다.

 

희망은 있다. 인권은 경제성장과 함께 발전한다. 2010년 이후 해마다 6-8%씩 성장한 미얀마 경제는 민주적으로 성숙 한 세대를 만들어냈다. 실제 이들이 반 쿠데타 시위를 주도 한다. 미얀마 인구의 절반 이상이 페이스북 가입자다. 인권과 IT, 그리고 글로벌 문화에 익숙한 이들은 다문화와 다민족에 개방적이다. 지난 3월 미스 그랜드 인터내셔널 대회에 참가해 “거리에서 죽은 미얀마 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고 외친 양곤대학생 ‘한 레이(HAN LAY)’는 1% 남짓한 몽족 출신이다. 지금도 방콕에 남아있는 한레이는 온라인을 통해 매일 미얀마의 상황을 포스팅한다. 그 온라인 공간에 민족과 종교의 간극은 없다.

 

민족과 종교, 군대와 피로 점철된 미얀마의 민주화는 결국 지금 20대의 몫이 됐다. 온라인에서 이미 하나가 된 이들이 현실세계에서도 연대할 수 있을까? 그것은 80년 전 미얀마 독립을 이룬 아웅산 장군의 꿈이었다. 수많은 버마족 젊은이들이 반 쿠데타 교전에 참여하기 위해 국경지대 반군에 입대하고 있다. 참고로 가장 큰 반군인 카렌족과 카친족은 기독교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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